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기록 관리는 더 편해질 것이고, 영구적인 보존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접은 지 오래.

내겐 일기가 없다. 사실, 있긴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꾸준히 써온 일기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내 일기는 그저 문장만 가득하지 않았다. 사진도 붙였고, 영화 티켓도 붙였으며, 필요에 따라 이것 저것 다 보관해두던, 창고였다. 내가 세상을 등져도, 누군가 내 삶을 볼 수도록 하리라는 생각으로 그리했지만, 은밀하게 서랍장 바닥에 숨겨둔게 화근이었다. 어머니께서 그 서랍장을 안쓰는 것 같다고 갖다 버렸으니까. 일기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날, 내가 다스리던 한 세계가 사라졌다.

고등학교 때도 일기를 쓰곤 했다. 그 습관은 대학교 2, 3학년 때까지 줄곧 이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부모님 댁에 가면 그 일기가 있다. 읽어보면, 참 웃긴다. 사춘기 시절, 언어적 고립감을 토로했고, 언어의 고립이 세계와 나의 단절이라는, 그래서 나를 누구도 100% 이해해줄 수 없음에서 오는 (그러면서 내가 세상을 100% 이해할 수 없음은 슬퍼하지 않는) “좌절감”을 가져왔음을 보며 혼자 낄낄 거리며 웃은 기억이 난다. 어디 그뿐이랴. 누굴 좋아했는지, 어떤 성적 상상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아… 그래서 지금은 열어볼 염두도 안나는 그 일기. 그렇지만, 내가 잃어버린 그 일기장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다.

그러다 동생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에 PC가 생겼다. (내가 대학갈 때는 PC를 장만하지 않았는데!) PC에 익숙해지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일기 프로그램 찾기. 좋은 프로그램 하나 찾았고, 차곡 차곡 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러던 어느날, PC를 갈아 엎으면서, 일기를 백업해두지 않았음을 깨달은 나… 디지털이라고 믿을 건 못되는 구나. 왜 나는 그 잘난 플로피 한 장이라도 백업해두지 않았을까?

그때부터인가 보다. 일기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디지털이라고 믿을 게 못된다.“가 아니라, “나 자신을 믿을 게 못된다.“가 맞는 말일 텐데, 디지털 세상이 되고 나서는 일기를 쓰는 재미를 상실했다. 보관할 자신도 없고.

디지털 카메라가 생기면서, 찍은 사진도 제법 된다. 작품이라고 할 순 없어도, 나름 보관하고 싶은 것들이었지만, 이것들 역시 백업할 때 실수 했거나, 백업 CD/DVD를 잃어버려 아쉬운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블로그가 생기고, 페이스북을 하고, 트위터를 이용한다. 이제는 이렇게 텀블러를 이용한다.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davideung ! 라이프로그를 만들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다시 뒤돌아 본다. 이제라도 늦은 건 아니겠지? 텀플러가 망하지 않는 한, 나의 일기를 따로 관리할 필요는 없겠구나. 이제는 디지털 공포를 떨쳐내고, 삶을 다시 바라보고 기록할 때가 된 것같다.

Mar 14th, 2010 12:42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