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쓰다 만 글. 아쉽지만, 독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리라.

슬라보예 지젝의 모습

슬라보예 지젝의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라는 그의 표현은 신랄한 제1세계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말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적어보자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자본가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은 자선이다.

제3세계에서 말라리아 퇴치하느라 매우 바쁜 빌 게이츠나,투기금융으로 떼돈을 벌어 자선 사업에 쏟아붇는 조지 소로스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대표적인 아이콘이겠다. 일찌기, 철강왕 카네기의 모습이 그렇다고 지젝은 일갈한다. 카네기는 사병을 동원해 자기 사업체에서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움직임을 철저히 부수었다.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짤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짠 것같다.) 그러면서도 문화, 예술, 사회 사업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으니, 적어도 그의 마음은 황금과 같지 않느냐고 지젝은 비꼰다.

이제 겨우 1장을 읽고 있을 뿐인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라는 말이 내 뒤통수를 때린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 세계에 살면서, 순응하고 그 체제 안에서 도덕적 만족감이나 우월감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사람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일 뿐이다. 지젝의 분류에 따르면, 요즘 말많은 우리 안철수 의장님도, 그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범주에 속할거다.

그의 말이 내 뒤통수를 때리는 건, 그의 비판이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인데,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그런 삶을 살아서리가 보다는) 그의 ‘후련한 지적질’을 통해 나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와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한다.

어떻게 정반대 방향을 나타내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하나의 표현으로 묶을 수 있었을까? 지젝의 표현은 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객관적 폭력이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할테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살아오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서구화되고, 전지구적으로 거의 모노컬처를 이루어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나는 무섭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서로 단절시켰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소비의 미덕”을 강요받고 살아간다. 생산? 그런 복잡한 문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소비를 통해 만족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수고롭게 그런 걸 생각해야 하는지? 그저, 소비만 하면 된다. 그러다 죽으면 끝이고, 죽음도 결국은 하나의 소비로 이어지는 기이한 세상. 그러면서 ‘생산 자원’으로서 투입되는 ‘노동’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