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는 교회 신부님께서 ‘세상은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 않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나에게 옳은 사람’인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진실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저만하더라도 저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겐 친근함을 느끼고, 그 외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에 떡하니 놓인 물건처럼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전혀 틀린 말이 아닌 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0:25-37)

누가 나의 이웃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나에게 덕이 되느냐?” 말고도 아주 많겠지만, 결정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제나 레위인은 죽은 사람을 만졌을 때 율법에 따라 자신이 부정해지리라 여겨 강도만난 이웃을 지나치기로 결정했을 겁니다. 어쩌면 가까이 강도들이 있으리라하는 두려움도 있었겠죠. 그래서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저도 그처럼 곤혹스럽거나 불편한 순간이 있습니다. 가끔이지만, 악취 나는 노숙자와 가까이 있다거나, 유난히 까칠한 직원과 함께 일해야 하는 직장 생활이 그렇습니다(그 친구에겐 제가 까칠하게 느껴지겠죠?). 그저 한 번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든, 늘 대하는 사람이든, 그렇게 마음의 담을 쌓아놓고 나의 마음에서 밀어냅니다. 그 때, 마음 한편에서 “너는 그 이웃을 사랑하느냐?” 묻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할 텐데, 들리지도 않는 걸 보면 저는 아직도 마음을 덜 닦았나봅니다.

다들 어떠신가요? 저는 꼭 강도만난 이웃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을 잘 품어내지 못하는 걸보면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잘 품지 못한 덜 여문 사람 같습니다. 언제쯤이면 ‘나’라는 울타리를 걷어낼 수 있을까요?